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5년 일본시리즈 (문단 편집) == 총평 == || [[파일:attachment/33-4.jpg|width=100%]] || || '''한 짤 요약.''' || [[일본]] 팬들 모두가 두고두고 [[한신 타이거스]]를 놀려먹는데 사용하는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관광패로 한신 타이거스는 '''3번이나 [[콜드게임]]급의 스코어를 먹고''' 장렬하게 침몰해버렸다. 3경기 연속 10실점에다가 그 중 한 경기는 머시 룰(Mercy Rule)이 아닌 기상악화가 원인이긴 했지만 진짜로 콜드게임이 발동되었다. 사실 경기가 1~2점 차라면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아도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고, 정 안되면 [[서스펜디드 게임]]을 진행하는 쪽으로 합의를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1이라는 참혹한 스코어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다. 기상악화 뿐만 아니라 '''한신의 처참한 스코어까지 고려된''' 콜드게임인 셈. 물론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통해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바로 전년도인 2004년에 [[퍼시픽 리그]] 2위팀인 [[세이부 라이온즈]]가 당해 처음 실시된 플레이오프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꺾고 파리그 우승해서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우승 팀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일본 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적어도 주니치는 7차전까지 끌고 가면서 대등한 승부를 펼쳤고 한신처럼 맥없이 털리지는 않았다. 이 참혹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결과에 한신 구단과 팬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연고지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 그리고 1985년에 첫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었을 때 오사카를 뒤집어 놓았던 열기를 생각해보면 [[폭동]]이 안난 게 신기할 정도로 떡실신을 당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는 폭동을 일으킬 기력조차 사라질 정도로 한신팬들의 넋이 나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시리즈가 시작하기 전에 한신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시리즈 중에 롯데와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의 차이만큼 팬들에게 충격과 정신적 낙차가 컸던 시리즈였다. 실제로 한신은 이 시리즈에서 일본시리즈 사상 최악의 기록을 여러개 세웠다. 시리즈 '''팀 최소 득점'''(4점),[* 참고로 한미 기록이자 세계기록은 [[NC 다이노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2점. 참고로 두 팀은 2020년에 나란히 한국시리즈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최악의 팀 평균자책점'''(8.63), '''최소 팀 홈런'''(0개)[* 일본시리즈 팀 무홈런은 사상 최초. 참고로 한신은 이 기록을 [[2014년 일본시리즈|9년 후]]에 한번 더 세운다.] 등등 한신이 보여준 경기력은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경기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 시즌의 롯데는 비록 퍼시픽 리그에서 2위를 했지만 승률이 '''0.632'''였고 오히려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한신 보다 승률이 훨씬 더 높았다.[* 다만 이 해의 퍼시픽리그는 100패 3보직전까지 간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덕분에 라쿠텐을 제외한 모든 팀들에게 승률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것은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신이 롯데를 꺾고 우승 할거라는 말이 나온 것은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는 2004 시즌부터 시행된 A클래스 팀만 참가하는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정규 시즌1~3위 팀이 토너먼트를 벌여 2~3위팀이 제 1스테이지를 치르고 제 1스테이지 승자와 정규 시즌 1위 팀이 제 2스테이지를 치뤄서 플레이오프 승자 팀을 [[퍼시픽 리그]] 우승 팀으로 만들고 일본 시리즈에 보내는 제도였다. 롯데는 당시 퍼시픽 리그 2위 팀이 였지만 세이부와 소프트뱅크를 차례대로 꺾고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력과 체력을 많이 소비하였다.[* 특히 소프트뱅크와의 2스테이지에서 롯데는 전력상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1, 2차전을 낙승한데 이어 3차전마저 9회초까지 4:0으로 앞서 3연승으로 가볍게 일본시리즈에 진출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9회말에 올라온 팀의 마무리 투수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믿을 수 없게도 거대한 불을 지르며 4실점으로 4:4 동점을 허용하였고 결국 연장전에서 롯데가 패했다. 여세를 몰아 소프트뱅크가 4차전까지 가져가 시리즈 스코어는 2승 2패로 타이가 되었으며, 분위기를 탄 이상 최종 5차전도 가져갈 것으로 보였으나 롯데가 천신만고 끝에 1점차 역전승을 거두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얼핏보면 롯데가 소프트뱅크와 플레이오프 혈전으로 많이 지친 상태인 상태로 한신과 일본시리즈를 가진것 같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당시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는 제1스테이지가 10월 8일부터 10일까지(실제로는 치바롯데가 세이부를 2-0으로 스윕하여 9일에 종료), 제2스테이지가 10월 12일부터 10월 17일까지 진행이 되었고 일본시리즈는 10월 22일에 시작했다. 즉 플레이오프의 제 2스테이지가 5차전까지 갔어도 최소 4일 동안 휴식시간이 있었고, 롯데는 이 기간동안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신은 정규리그 최종전을 퍼시픽리그 제1스테이지가 시작하기도 전인 10월 5일에 치렀고, 최종전 이후 일본시리즈 이전까지 무려 '''16일''' 동안 휴식기간을 두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지나치게 길게 쉬다 보니 한신은 경기감각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제도는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도입된 이후에도 적용이 되었다.][* 실제로 [[KBO 리그]]에서 [[1987년 한국시리즈]]때 [[삼성 라이온즈]]가 [[해태 타이거즈]]랑 상대할때 이런 일정문제 때문에 당했다. 여기도 OB와 해태가 플레이오프 5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였지만, 전국체전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플레이오프 종료 이후 한국시리즈까지 '''8일'''이라는 휴식 기간이 주어졌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은 10월 5일 해태와의 정규리그 최종전 이후 10월 21일 한국시리즈를 하기 전까지 '''15일'''을 쉬어버려 경기감각을 다 잃어버린 것. 휴식일정이 되려 상위팀에게 독이 된 셈이다.] 물론 NPB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센트럴리그 개막일(4월 1일)을 퍼시픽 리그(3월 26일)보다 1주일 늦게 하고, 센트럴 리그의 경기수(146경기)를 퍼시픽 리그(136경기)보다 10경기 더 배정했지만,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자체가 퍼시픽 리그가 종료되고 한참 이후에 치러지는 바람에[* 이 해 퍼시픽 리그는 9월 28일에 정규리그 최종전을 진행하였다.] 이 사단이 나게 된 것. 즉 애초에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자체가 [[센트럴 리그]]의 우승팀에게 불리한 제도였고[* 상기한대로 당장 [[2004년 일본시리즈|작년]]의 [[주니치 드래곤즈]]가 당했다. 이후 주니치는 [[2006년 일본시리즈]]에서도 닛폰햄에게 무릎을 꿇었다.], 4일 동안 쉬고 온 롯데가 한신을 이렇게 털었는데 만일 롯데가 소프트뱅크를 스윕하고 8일 동안 쉬고 한신을 상대했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스코어보드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 중반까지는 비교적 팽팽하게 진행되다가 6회 이후 빅이닝을 내주면서 단숨에 무너지는 패턴이 세 경기 연속으로 벌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세 경기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갔냐면, 1차전은 에이스 이가와가 5회까지 이미 4실점하며 털려버렸는데도 6회에 또 올려 기어이 5실점 채우고, 7회에 신인 추격조 투수 하시모토가 올라왔는데 0.1이닝 동안 홈런 2방에 5실점을 하는 끝에 농무 콜드게임을 당한다. 2차전은 선발 안도가 5회까지 2실점으로 그럭저럭 막고 있었는데, 6회에도 올려서 아웃카운트 하나 잡는 동안 홈런 두 방 맞고 3실점을 추가로 해서 5실점 채우고 강판, 추격조 투수 에구사가 올라와 2.2이닝 동안 또 5실점을 했다. 3차전은 선발 시모야나기가 5회까지 3실점을 하고 6회에 후지카와가 올라와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는데, 후지카와를 7회에도 올렸다가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은 채 4실점을 당하고 강판, 이후 올라온 추격조 사지키하라도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후쿠우라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며 3실점(1점은 후지카와 승계주자)을 당해 그대로 셧아웃. 한신 팬들이 우주최강이라고 자부하던 필승조 트리오인 JFK를 보유한 팀의 경기 패턴이라고는 믿기 힘든 전개이다. 사실, 이 3경기에서 JFK가 무너진 것은 3차전 딱 한 번이 전부다. 그나마도 F([[후지카와 큐지]])만 출전해서 털렸고(1이닝 4실점 3자책), '''나머지 둘은 1-3차전 내내 등판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이유는 당시 한신 감독인 [[오카다 아키노부]]가 'JFK는 필승조'라는 명분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 중반 이후 리드를 잡으면 6~7회부터 JFK를 투입해 확실하게 경기를 매조진다는 것이 오카다 감독의 기본 전략이었는데, 문제는 그 세 경기 동안 한신이 한번도 중반 이후 리드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테이블 세터든 클린업 트리오든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삼진과 범타, 병살타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리드는 꿈도 꿀 수 없었고, 도리어 5회까지 롯데에게 근소하게 리드를 허용하는 예상 외의 전개에 JFK의 투입시점을 결정하지 못해서 선발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려다 그 선발이 털려 점수차가 감당 안 될 정도로 벌어지자 경기를 포기한 듯 추격조를 올리는 패턴이 반복된 것. 단기전에서는 선발이 털릴 조짐이 보이면 필승조라도 주저없이 꺼내서 실점 위기를 차단하고, 3차전처럼 필승조 중 하나가 털릴것 같다 싶으면 다른 필승조를 바로 꺼내는 과감함을 보여야 하는데, JFK는 승리조라는 명분에 지나치게 빠져 JFK의 투입시기를 놓친 것이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한신 대참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허구연]] 감독 역시 일본야구의 맹점이 이러한 경직성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즉,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것. 교과서적인 정석 플레이를 고집한다는 점인데 이게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이런 방식의 경기운영을 보이는 경직성을 보였다. 이것은 비단 야구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약점이다. 일본 사회, 특히 일본의 공무원들은 메뉴얼에만 목을 매달아서 메뉴얼에 1mm만 벗어나도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 시절의 이야기이다. 일본은 2010년대 들어 구속 혁명을 이뤄내고 MLB 못지 않은 수비시프트를 쓰기 시작했으며, WBC등 국제대회에서 보직파괴와 빠른 투수교체등 틀에 박히지 않은 야구를 추구하며 우승을 가져갔다. 일본의 통상사회도 경직되어 있는 전통의 대기업과 달리 IT기업들은 한국기업에 비해서도 훨씬 자유롭고 빠른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도 많다.] 1, 2차전 마린 스타디움에서 콜드게임급의 대패를 당하자 한신의 코칭스태프는 부랴부랴 투수 운용 계획을 변경했고 상황에 상관없이 필요하면 JFK를 경기 중반에 조기에 투입하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러나, 3차전은 1-3으로 지고 있는 6회에 JFK의 F인 후지카와 큐지를 올려 1이닝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하필 7회까지 추가로 맡겼는데 후지카와가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고 4실점을 하며 빅 이닝을 내주고 말아 1, 2차전과 똑같은 전개를 맞고 만다. 한신이 자랑하는 JFK 중 하나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F가 4실점이나 하는 통에 3경기 연속으로 콜드게임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한신 선수단은 멘붕 상태에 빠진다. 이미 대세는 치바 롯데에게 넘어가 있었고, 그나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4차전은 최소 실점으로 버텼으나 플래툰 취급 받던 [[이승엽]]에게 결승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한신은 멸망했다'''. 그야말로 단기전에서의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유연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판이었다. 그 외의 패인이라면 초반에 리드를 잡거나 리드를 내줬을 때 점수를 내지 못해서 JFK의 투입시기를 잡지 못하게 만든 물방망이도 들 수 있다. 한신의 물방망이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4번타자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4차전이 되어서야''' 첫 안타를 쳐내고, 카네모토의 2005년 일본시리즈 타율은 '''1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4차전에서 한신은 9회말 번트 실패를 비롯한 병살을 4개씩이나 치는 막장 타선을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센트럴 리그]]의 불합리적인 [[퍼시픽 리그]]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제도와 한신의 고집된 운영 및 임기응변 부족이 불러온 참사라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여담으로 한신 오카다 감독이 본격적으로 이승엽에게 눈을 들이기 시작한 계기가 이때의 일본시리즈였다. 홈런 3방은 물론, 4차전은 이승엽 혼자 캐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대활약을 펼쳤고, 그 다음해인 200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41홈런을 쳤고 이 때도 특히 한신을 상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이승엽의 일본 생활 말년 극도의 부진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당했을 때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오카다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승엽은 오릭스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고, 이승엽의 일본 마지막 해인 2011 시즌, 낮은 타율에도 오카다는 이승엽은 홈런타자라 충분히 위압감이 있다며 끝까지 감쌌다. 심지어 2011년 시즌 후 이승엽이 한국프로야구 복귀 의사를 밝히자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오릭스와 재계약을 하자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승엽이 2012년부터 외국인 쿼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점(일본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8시즌을 채우면 그 뒤로는 팀 외국인 쿼터에 들어가지 않고 내국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으며 그만큼 외국인 선수를 하나 더 쓸수 있다) 때문이 크긴 했지만, 일본 야구계에서는 실제 수치상 성적에 비해 이승엽을 높이 평가하는 야구인들이 상상외로 굉장히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니치 명포수 출신 다니시게 모토노부로 방송에서 이승엽이 안 나온 날이 심리적으로 제일 편한 날이라고 했을 정도. 오죽하면 이승엽이 4타수 4삼진을 당해도 타석에 서있는 것만으로 공포 그 자체라고 했다. 이는 이승엽이 WBC와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결정적인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